평범한 목사 2018. 4. 27. 08:28

어제는 공짜 영어 강의 사이트를 찾았다. 흠...앱 제목이 생각이 안나지만, 아이패드를 더 사고 싶어졌다..흐엉--!

예일 대학교 강의 3개와 노스웨스턴 강의 1개를 신청했다.

일단, 클래식 입문을 듣고 있다.

It's very difficult to hate someone who passionately loves the same music that you do. -Craig Wright

가장 인상 깊었던 글귀이다. 몇 가지 더 있었지만, 까먹었다. 옮기진 않겠다. 교수님이 약간 뉘앙스가 도발적인 단어를 몇 가지 쓰는 것 빼고는 다 좋았다. 서론, 클래식과 팝 음악의 차이점(전기음, 리듬_비트감, 악보 유무 등등), 음악과 감정 에 대해서 들었다. 평소에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고, 영어도 공부하고 싶었고, 좋은 강의에 대한 야망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감사하다. 무료라서..강의 하나하나가 엄청엄청 고퀄리티이다. 교회사도 3강 들었는데, 3강째 박물관을 방문하여, 씨리아 유물을 본다...수준이 좋다. 일단 클래식 음악 입문부터 다 수강하고 그 다음에, 교회사 차근차근 듣고, 그리고 루터와 서구문화 그리고 중세 예술을 들을 계획이다. 다 완주하도록 하자.

아침에 계속 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독서시간을 아침으로 바꿨다. 


여전히 클라우스 헬트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527-563(36p).

미케아벨리와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에 대해서 읽었다.

미케아벨리 "군주론"에서 독재자_절대권력(프린치페)를 주장한 이유를 사상적 흐름에 따라 설명한다.

중세 후기는 주지주의-주의주의로 넘어오게 된다. 중세는 신의 모상을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도 신의 지식에 따라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주의주의로 사조가 바뀌면서(_넘어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히 기억이 안난다. 다시 찾아봐야겠다), 지식의 관점이 의지의 관점으로 대체된다. 인간이 신을 모상한다는 것은 그 의지이다. 즉 창조적 의지_이로써 르네상스 때에 인간의 다양한 창조의지가 발현된다. _여전히 신의 모상이라는 의미에서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중세후기이다.

정치적 상황은 어떤가? 주의주의로 바뀌면서, 질서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한한 의지_야망을 제어해줄 프린치페가 필요하다. 즉, 정치의 기본 목표는 질서유지 혹은 권력 상태인 스타토의 유지이다. 의지의 무한한 개방(암비지오네)으로 인간은 자기 파괴에 이르고 공동생활이 유지가 힘들어진다. 이 때, 공동생활에 안정성을 가져오며, 인간적 형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프린치페(절대자_법체계를 벗어난 1인)이다. 절대자에게는 질서 유지가 1번 척도이기 때문에, 도덕적 척도를 그를 평가할 수 없다. 그에게 비르투(덕)이란, 도덕적 올바름이 아니고, 권력상태의 안정성으로 말미암은 사회 안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정치가는 실패하곤 한다. 탁월한 정치가는 이념에 따른 존재인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념이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불가피하다. 정치가로 실패를 향하게 하는 시대적 상황, 보이지 않는 힘을 포르투나라고 한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는 학문에 있어서 주의주의를 받아들여, 근대적 탐구를 시작한다.

그는 무지로부터 시작한다. 무한한 신의 의지, 은폐된 신, 인간은 더이상 신을 알 수 없게되었다. 그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가 남는다. 바로 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학식있는 무지'이다. 따라서 그는 이 전제 아래서 바로 신의 흔적들을 뒤쫓는 탐구를 시작하며, 점점 더 정확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은 '상징'이다. 상징은 그림이고, 신의 무한성을 인식가능하게 가시화한다. 따라서 그는 학문함에 수학의 도움을 받는다. 특히 그의 설명 중에 직선 속에 숨어있는 삼각형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인식론 전체를 대변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선, 그 자체는 일자이다. 그 안에는 한 점을 찍어서 들어 올리면 삼각형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며 창조물이다. 이 직선 안에는 수많은 삼각형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삼각형은 그 꼭지점에서 부터 직선인 변을 향해 점점 내려 갈 때, 신과 가까워 진다. 하지만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완전한 '내림'이 곧 가장 '큰' 일자와의 일치이다. 따라서 일자는 '반대의 일치' '대립성의 일치'라는 무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인식의 출발은 구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구별하고 서로 떼어서 비교를 통해 개념을 파악한다. 일치하고 있는 것을 떼어 내는 것이 이미 일자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구조로는 파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