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2, 3 요약 /교사 나눔 자료
② “내 마음대로 옷 좀 입게 내버려 두세요”_선택과 결정에 대하여
청소년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데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내는지도 모릅니다. 청소년 초기는 자기 정체성이 상당히 모호합니다. 그래서 어떤 영웅에게 정체성을 투사하거나, 어떤 그룹에 동화됨으로 그 사실을 숨기려합니다. 어딜 가나 똑같은 청소년의 옷차림과 언어가 그들의 보호막입니다.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은 힘든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체성은 결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청소년은 결정하는 법과 그 결정의 결과에 익숙해지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종종 청소년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연습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부모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반발합니다. 이런 갈등을 방치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내면에 관심 없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만 관심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사무엘상 3장은 아이의 성장의 측면에서 유용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정체성 형성 중에 있는 아이를 존중하라고 부모를 격려합니다. 본문에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건은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청소년의 중요한 체험을 보여줍니다.
정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사무엘상 3장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개인의 이름을 강조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누구도 그 소리를 대신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직접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 바로 ‘한 사람’으로 보신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남들이 자기를 한 개인으로 알아봐 주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으로 보시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끝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고 응답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사무엘의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청소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실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청소년은 하나님의 불러주심 앞에 응답함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맞게 선택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시는 곳이며, 그 선택에 응답하여 주께서 ‘맞다’고 하시는 것에, 우리도 ‘그렇습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선택이며, 행동이 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 선택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부모가 여기서 겪는 어려움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은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하나님께 의탁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하여, 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부모로서 공감으로 그들을 지켜볼 수 있으며, 경건한 지식에서 비롯된 자신감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눔 질문) 자녀(혹은 학생)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어떤 변화들이 나타났습니까? 그 중에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고, 어려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실망을 느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③ “나 교회 안 갈래요”_거부와 저항에 대하여
청소년들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의도에서, 때로 ‘부정’과 ‘거부’라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신앙을 추구하면서, 비개인적이거나 제도적인 것은 무엇이든 거부합니다.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협박’도 심심찮게 합니다. 이러한 협박에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 부모는 감정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억지로’ 교회에 가게해야 하는가? ‘내버려’둬야 하는가? 어떤 것인 도움이 될까? 방해될까? 고민합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신앙 지도에 있어서 부모의 임무는 명확했고 간단했습니다. 이제 청소년은 더 이상 ‘배우는 자’가 아닙니다. ‘결정을 내리는 자’로 변했고, 이 변화에 따라서 부모와 자녀의 신앙 지도의 관계도 변화해야합니다. 그 자리는 낯설고 어색하고 불안합니다.
부모와 자녀와 새로운 관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개인적인 신앙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야 하는 소명이 더해진 것입니다. 이제 자녀는 부모가 성인(saint)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날마다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입니다. 이제 부모는 충고하고 지시만 내리지 말고, 적어도 가끔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개인성장사에 관해 함께 나눌 때가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확신의 태도만을 고집하면 신뢰에 장애물만 쌓이게 됩니다.
청소년들의 신앙적인 반항은 수긍이 갈 정도로 합리적일 때도 있고, 때때로 약을 올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저항의 이면에는 신앙 안에서 치르는 ‘영적 성년식’이 있습니다. 이제 십대 자녀들은 어른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순탄하지 않더라도, 유익한 시간입니다. 부모들이 한 신앙인으로 가졌던 씨름과 성취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저항하는 것은 무신론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가 되어 가는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 복음의 핵심, 개인적인 결단의 요청 ‘부모의 신앙이 아닌, 자신의 믿음’ 요청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남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는 한 ‘새 사람’의 성장이 자신의 자존심에 의해 방해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고 신실하게 참여하여 풍성해질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 때 부모들은 실제적인 사항들을 다룰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나눔 질문) 자녀들(학생들)이 “교회 안갈래요”라고 말하거나 교회에 가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일관된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까? 원칙을 재점검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