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몰라..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 55-80(25p)
스미스는 정치를 바라볼 때, 두 가지 시선을 제안한다. 1) 장소적 개념을 거부하라. 공간화, 혹은 영역화 하지 마라. 결국 그러면 우리의 질문들은 협소해진다. ‘교회’와 ‘국가’라는 두 영역에서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협소해진다. 그러나, 이 경계들은 불분명하다. 언제 어떻게 이 선을 넘었는지 알 수 없다_이것은 이전 페이지에서 좀 설명했다.
본 장에서는 2) 궁극적인 것과 준긍극적인 것을 구별하지 마라. 결국 궁극적인 것은 달라도, 준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서로 협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함정이다. 결국 준궁극적인 것은 궁극적인 것에 영향을 끼친다.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에서 말한 신화적인 공민 신학으로 묘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결국 신화적인 것/공민적인 것. 신화적인 우스꽝스러움과 공민적이라고 불리는 합리적인 것은 섞여서 발전한다. 예를 들어서, 스포츠이다. 스포츠는 지극히 준궁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사랑을 조정하고 삶의 방식을 바꾼다. 상상력을 변화시키며 궁극적인 것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 중에 스미스는 탁월한 견해라며 마우의 “다원주의 지평들”을 소개하면서 비판한다. 마우의 주장은 다원주의를 세밀하게 구분(지향적 다원주의_궁극적인 질문은 달리한다_, 관계적 다원주의,_유대관계 연결망들 ‘영역’_, 상황적 다원주의_다채로운 문화)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관계적 상황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궁극적인 관심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사실상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식의 강요도 없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불가지론적인 사회의 결과는 더 극심한 불안을 초래하였다. 스미스는 궁극적인 것, 준궁극적인 것 자체에 경계는 없으며, 성경은 분명한 종말론적 지향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