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독서 일기

1세대 목사 가정 이야기(Pastors Kinder), 클라이수 핏셴, 이미선 역(홍성사)

평범한 목사 2023. 9. 14. 15:32

요약하거나 감상을 쓰지 않으면 증발하기에 시간을 투자하여 간단히 기록한다.

 

서론 목사관의 역사를 통해 교회의 미래를 그리다 pp10-25 /230915

 

아마도 독일어 원제는 목사들의 자녀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의역해서, 목사 가정 전체를 이야기하는 듯한 뉘앙스이다.

 

독일의 목사관 그리고 목사의 자녀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목사관이라는 건물 자체에 집중하면서도, 그곳에 속한 가정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동시에 특별한 장소에서 자란 목사의 자녀에 대한 서술이다. 독일 사회에서 '목사 자녀'가 준 사회적 영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한 번 즘은 다루어져야만 하는 주제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는 다른 점이 있다. 독일 목사는 공무원에 가깝다(물론 소속 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이 사는 공간인 목사관은 우리 나라 교회로 치면, 사무실과 교육관의 역할정도이다. 24쪽에 저자가 요약한 목사관에 대한 묘사가 핵심인 듯하다 "나는 목사의 아들은 아니지만 어릴적 ... 목사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집무실, 부엌, 거실 세 곳은 개방된 장소였다....집무실은 청소년의 여가 시간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 관한 다양한 준비 회의를 위해 열려 있었다....거실은 생일을 위해 열려 있었다... 부모님 집을 대신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는 다리, 그리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소망 안으로 이어 주는 다리였다."

 

나는 목사 아들이었고, 사택(소위 목사관)에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개척교회를 하셨다. 저자가 말하는 목사관은 어렸을 때 우리집과 비슷하다. 어쩌면 내가 경험했던 목사관은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독일의 목사관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목사 아들로 책을 읽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책을 열면서, 목사관은 목사의 가정보다도 오히려 교회의 기둥과 같았다고 하는데..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서의 추억이 바로 신앙형성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은 아닐까? 신대원 졸업할 즈음에 나는 또다시 개척교회에 경험했다. 개척 멤버였다. 그때 예배당은 교역자의 거실이었다. 그곳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교회는 고유한 분위기를 담을 수 있었지 않았나?

 

 

1.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탄생한 목사 가정 / 230915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가정생활

구교 가톨릭의 사제와 달리, 이제 목사에게 가정이 생겼다. 1525년 마르틴 루터는 카티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사실, 루터는 결혼이 필요하지 않았다.) 루터는 너무 유명했기에, 그의 결혼은 사회적 이슈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거주지로 하사 받았다. 그의 집은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많은 손님 때문에 큰 집을 유비 보수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도 있었다(루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의 결혼이 합법화 되다

가톨릭 사제가 종교개혁으로 목사로 대체되면서,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 같다. 사실상 당시에 성직자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컸다고 한다. 가톨릭 사제에게 내연녀와 자녀들은 공공연했다고 한다. 루터는 사제 독신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교에서는 목사의 결혼이 합법화되었고, 사제였다가 목사가 된 이들은 자신의 내연녀와 공식적으로 결혼하며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다(개혁가들은 결혼을 하라고 설득했다).

 

관심과 표적이 된 직업, 개신교 목사

루터는 교회가 무질서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재세례파적 경향을 경계). 만인제사장을 주장했지만 목사직이 필요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성직 임직의 의미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 교구, 목사직을 정치 체계 안에 질서 지웠다. 목사직은 목사와 교구라는 파트너 관계에 기초했다. 그리하여 목사관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점이 나오는데, 루터파는 가장이 각 가정에서 목사의 지위를 대신하게 했다. 가족 집단은 하나의 작은 교구였다. 성찬식은 목사만 집행했지만, 개개인 가장의 종교적 자격을 강화했다. 반면에 장 칼뱅은 목사직은 참여 공동체 모델의 일부분이었고 교구 지도권은 대체로 목사가 아닌 장로회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루터파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이 지점에서 조금 흥미가 떨어졌다..ㅜ). 그리고 30년 전쟁-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이후에 백성의 삶은 피폐해 졌고, 재건을 위해 세월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목사는 배치되었고 경제적 부양이 보장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