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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직분

포스트모던 사회 속 교회

평범한 목사 2018. 10. 6. 21:42

****박영돈 교수님의 교회론 수업을 종합하여 재조직한 것입니다.

글을 악용하지 마십시오.



포스트모던 사회 속 교회



서론

헤르만 리덜보스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며, 그 사회의 특징으로 “개인주의”, “반권위주의”, “세속화”을 꼽았다. 이미 한국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가 되었고, 사회의 구성원에게 “개인주의”, “반권위주의”, “세속화”가 내면화되었다. 남들이 어떤 피해와 고통을 당하든지, 자신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말인 “나만 아니면 돼-”가 최근에 유행했다. 이와 같은 유행어는 한국인의 개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자신을 제한한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하지 않는 반권위주의적 태도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신 위에 어떤 권위도 두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님, 부모, 도덕법까지 거부한다. 그리고 세속화로 인하여 사회생활에서 하나님이나 신적계시가 설 자리는 없어졌다. 종교는 개인의 사적영역일 뿐이고, 공적인 자리에서 종교를 이야기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 

리덜보스가 걱정하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화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한국 교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개인주의”, “반권위주의” 그리고 “세속화”의 흐름에 맞서서 성경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가? 현재의 상황은 비관적이다. 교회가 점점 대형화 되면서, 점점 사회를 닮아간다. 교회 깊숙이 개인주의가 스며들고 있다. 서로의 진정한 얼굴은 모른 채 예배만 참석함으로 종교적 만족감을 느낀다. 직분자들은 아름다운 권위를 보여주지 못한 채 각종 비리와 범죄로 스스로 권위를 잃었다. 언약의 자녀들은 세상 성공에 헌신하기 위해 시험 기간이면 교회를 비운다. 교회가 세상의 흐름에 굴복할 만한 존재인가? 진정 교회는 현대 사회에서 어떤 존재여야 할까?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개인주의와 교회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현대 사회 “개인주의”를 저항한다. 신약에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70인역에서 “카할”을 번역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카할”은 총회라는 뜻으로, 하나님 백성의 전체 모임을 의미한다. 이 모임에는 언약적 의미가 담겨 있다. 신약에서 사용된 “에클레시아”가 고전 그리스어에서 회합, 모임을 뜻하는 데 사용했지만, 신약에서 사용할 때는 70인역의 배경에 따라 카할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교회를 뜻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 단어의 개념에서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적이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 사건에 근거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세상에서 자신과 붙은 무리인 교회를 일으키셔서 온 땅을 주관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 분과 연합한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의 몸으로 연합한다. 교회가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때, 참된 연합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즉, 육신의 특성인 ‘자아 중심성’ 즉, 개인주의가 파괴된다. 성령의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인 연합과 교제가 충만하게 된다. 

교회는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못된 옛 자아를 부시는 성령의 전이다. 모세의 성막과 구약 성전 그리고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강림 사건으로 교회는 성령이 흘러넘치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충만하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충만하셔야 한다. 그리고 충만한 성령 체험은 공동체적이다. 성령은 사랑, 교제, 연합, 공동체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전인 교회는 자아 중심주의, 개인주의를 배격한다. 

교회는 본질 이해의 기초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다. 이 세 가지의 본질 모두 개인주의를 극복한다. 현대 사회를 닮아 개인주의화 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아들의 선물과 성령의 선물을 누리며, 아들과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성부를 누린다. 그리하여, 교회는 선물로 받은 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공동체이다. 


탈권위와 교회

교회는 반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참 권위를 인정한다. 교회는 성경 말씀을 듣고, 성경 말씀에 순종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셨다. 성경 권위를 인정하지만, 성경에는 항상 해석이 동반한다. 이 해석의 세계에 반권위주의적 세계관이 은밀하게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롱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한다. 텍스트 자체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배경에는 상대주의적, 반권위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 텍스트를 해석할 때도 작용하여, 독자에 의해 성경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텍스트 자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들을 필요 없이 독자의 주관적 관심과 필요와 유익에 맞게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해체하고 성경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해석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뿐 아니라, 성경 해석에서도 역사적인 교회에서 합의된 보편적인 해석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교회를 인도하신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계속 말씀해 오셨다.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말씀하신 바를 들어야 한다. 즉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성경 해석의 전통의 견해에 주목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 속에 진행되어 온 성경 해석 전통들과 발전들에 귀 기울이고 연구하고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교회는 반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참된 권위인 성경을 존중하고 해석에 있어서도 역사적 해석의 권위를 존중한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므로, 반권위주의를 거부한다.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므로, 반권위주의가 낄 틈이 없다.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신다. 그리고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나님을 계시해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방법까지 계시해주시며 교회는 계시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에 따라 삼위 하나님의 영광과 구속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을 찬양, 경배함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순종하고 섬김이다. 따라서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예배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또한 교회는 “직분과 은사”라는 참 권위에 인정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준 선물로 목사가 있다. 그가 영적으로나 본질적으로 성도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목사에게 특별한 사역이 주어졌다. 바로 교회의 리더, 감독자의 임무이다. 목사는 성령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성령도 목사 없이 일하지 않으신다. 인간 목사를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 목사와 성령의 은사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성령 충만을 주셔서 능력과 자질을 구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목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성도들로 은사를 계발하여, 교회를 세우는 생활을 하게 한다.

그리고 장로의 직분을 주셨다. 참 권위가 있어야 할 직분이 한국교회에서는 감투 혹은 권위주의로 변질되어, 반권위주의를 더 부추기고 있다. 거짓 권위가 더 교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장로는 다스리고 돌보는 직분이다. 장로의 역할은 목사와 함께 사도적 복음과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직분의 참 권위를 회복함으로 반권위주의인 세상의 흐름을 배격해야 한다.



세속화와 교회

교회는 세속화될 수 없다. 오히려 날마다 성화되며, 주님을 세속에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앞서 교회의 예배하는 삼위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공동체라고 말했다. 또한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운다. 예배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함께 체험하며 그의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교회의 예배가 주님을 공급받는 중요한 은혜의 채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므로, 교회는 그리스의 계속되는 사역을 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께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자신의 새로운 몸으로 택하셔서 세상에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교회는 세속에 물들 틈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상을 변화시킨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 죄로 망가진 인생들을 고쳐 샬롬을 회복하게 하신다. 

또한 예배는 교회에 속한 개인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세상 많은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다. 참된 예배는 세상에 기여한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짓게 하시고 성전에서 예배드리게 하신 것도 온 세상을 복 주기 위함이었다. 교회는 예배에서 온 세상을 향한 복을 선포한다.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기도로 해결한다. 

사도행전을 살피면 복음 전파하여 교회의 터를 닦는 사명을 위임받은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다. 기도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이며, 세속에 물듬과 대척점에 있다. 기도를 통해서 교회는 세워진다. 구약의 성전에 분향하는 향이 올라가는 것 같이, 교회의 기도의 향은 끊임없이 올라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기도의 집”이다. 그런데 기도조차도 세속화될 위험이 있다. 바로 교회 성장과 세상 번영을 위한 방편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을 흐려서 교회를 세속화하게 하려는 마귀의 계략이다. 세속적이고 기복적이며 율법적인 기도는 개혁되어야 한다.

회복된 기도는 어떤 것일까? 기도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과 동역이다.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주심에 따라 사람이 자신을 드릴 때 참 연합과 교제를 누린다. 이러한 교제가 기도의 참 본질이다. 때때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응답이다. 그리고 기도는 삼위일체적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야 한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체험한다. 성령의 중보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영광과 특권을 기도 속에서 체험한다. 또한 삼위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이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과 동역하는 영광스러운 파트너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고 죄로 오염되어 파괴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을 기도로 할 수 있다.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세속을 변화시킨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교회이다. 세속에 물들고는 선교를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의 의해서 세속화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교회가 세상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먼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 거룩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선교는 단순히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선교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확장하는 사역이다. 땅 끝가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석적인 사역이나 선교는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변혁, 우주적인 갱신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이 사회와 세상의 어떤 영역과 차원도 교회의 선교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말하듯이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어 더 이상 세속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불법과 불의와 교회가 행하는 자본원리에 의해서 교회가 빛을 잃었다. 복음에 대한 최고의 변증이 교회 자체여야 하는데, 반대로 예수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싫다는 말을 듣곤 한다. 세속을 변화시키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다움이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가 회복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령의 열매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통해 빛을 발산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흘러넘치는 특성에 의해서, 성령 충만한 교회가 성령을 세상에 흘러가게 해야 한다. 성령을 흘러가게 하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향한 선물이 된다. 

세속 속에 교회는 매주 주일 성례를 보고 그리고 먹고 마심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고, 새사람이 날마다 자라게 한다. 교회의 성례는 말씀에 근거하며 말씀을 인치며 외적으로 표상한다. 칼빈은 성찬을 보이는 말씀(가시적인 말씀)이라고 보았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이다. 세례는 우선적으로 삼위일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이 교회 안에 그리고 사람 안에 실현되고 확증되는 것이 세례이다. 삼위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고,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한 교제 속에 들어감을 뜻한다. 또한 교회론적 관점에서 세례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다. 제한적인 비유이지만, 세례는 결혼식에서 부부가 할 몸이 되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예식이다. 그리하여, 세례는 받고 보고 들음으로 성도를 교육한다. 교회의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 의무가 무엇인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다시 생각나게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새 유월절, 새 출애굽 곧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사건을 표상하는 예식이다. 성찬은 새언약의 복음을 형상화 하며 교인들의 마음에 그 의미를 새기는 가시적인 말씀이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표상한다. 성령 안에서 천국 잔치를 현재에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성찬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교제를 나누신다. 따라서 성찬은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다. 성찬은 말씀과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봄과 들음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인식하는 방편이다. 성찬을 통해 교회가 누리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칼빈은 성찬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의 약속으로부터 오는 자기 내어주심이라고 보았다. 성령을 통해 신비한 방식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피를 흘리신 구속 사역의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하신다. 영적으로 침체된 자들이 새롭게 되며 강건해지며, 속박된 자들이 자유하며, 병든 자들이 치유 되며 부활의 생기로 충일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교회는 성찬 공동체로서 세속과 구별되는 새 정체성을 가졌다. 

정리 및 결론

종합하여 정리한다면, 시대마다 교회를 흩어버리고, 약화시키려는 시대의 도전들이 있었다. 초대 교회는 강력한 고난과 핍박으로, 중세는 세속 권력과 규합함으로, 현대 모더니즘에는 합리성으로 교회를 제단하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맞이한 시대는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개인주의, 탈권위, 강력한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야 할까? 교회의 본질적으로 개인주의를 배격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권위에 순종한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를 존중한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로 반권위주의가 낄 틈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한다. 그리고 교회는 세속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거룩하게 한다. 참된 예배를 통해 세상에 생명수를 전달하며, 기도를 통해 세상을 정화한다. 그리고 날마다 성화됨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나타낸다. 그리고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것이 교회이다. 






*글을 악용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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